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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자콥의 생전 모습

유태계 시인 막스 자콥은 1876년 프랑스 브르타뉴의 수도 캥페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세가 되던 해 프랑스 파리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아직 젊은 화가였던 파블로 피카소와 친분을 맺게 된다. 자콥은 피카소에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 것을 허락했으며, 피카소가 경제적으로 자립에 성공해 아틀리에를 얻자 그의 아틀리에에 훗날 유명해지는 ‘세탁선’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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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자콥의 고향, 캥페르

전후 전위 예술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로 달아오른 프랑스 파리에는 수많은 젊은 보헤미안 예술가 들이 몰려들었다. 자콥은 훗날 야수파(큐비즘)라 불리는 보헤미안 화가들을 위해 ‘정신적 지주’ 아폴리네르와 더불어 이론가이자 대변자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파리에서 등장했던 셀 수도 없는 화풍과 학파들 중, 오늘날까지 야수파가 인정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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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자콥은 피카소가 그린 작품 중 최고의 걸작 중에 하나인 ‘아비뇽 여인들'이라는 작품에 직접 제목을 붙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괴기스러움에 가까운 기하학적인 인물과 배경 묘사로 훗날 예술계에 충격을 던졌던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 대면한 자콥은 스페인의 수도 바르셀로나에 있는 유명한 사창가의 이름을 작품명으로 선사했다. ‘보헤미안들의 대변가’이자 시인이었던 막스 자콥이 아니었다면 절대 발휘할 수 없는 작명 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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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렝


이러한 자콥의 자유로운 사상에 매료된 대표적인 친구들로는 시인 장 콕토(Jean Cocteau)와 영국화가 크리스토퍼 우드(Christopher Wood) 그리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나치에 맞서 싸운 프랑스의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렝(Jean Moulin) 또한 이 무렵 자콥과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막스 자콥은 모딜리아니와 3년간 열애했던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를 소개할 만큼 절친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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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콕토의 실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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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가 그린 <장 콕토>


하지만 자콥은 ‘자유로움과 개성이 넘치는’ 보헤미안들의 사상과 예술을 대변했지만, 정작 본인은 전위 예술이 아닌 조요하고 평범한 삶을 추구했다. 때문에 그는 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이었던 1944년 게슈타포에 의해 은둔지였던 드랑시(Drancy)에서 체포되기 전까지 약 30년간 외부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소설 Saint Matorel (1911), the verses Le laboratoire central (1921), and Le défense de Tartuffe (1919)등이 유명하며, 그의 사후에도 유작들이 유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추가로 발견되어 유고작으로 발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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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자콥이 숨진 드랑시 유태인 수용소


사실 게슈타포에 의해 '드랑시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 감금된 막스 자콥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체포 후 4년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절친한 친구였던 파블로 피카소와 몇몇 친구들에 의해,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성당에 묘지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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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2 21:27 2008/01/2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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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의 초상>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었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는 유학을 위해 파리에 왔지만,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으로 화상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폴 기욤의 소개로 처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만났다. 당시 파리에서 가장 수완이 뛰어난 화상 중에 한명이었던 폴 기욤은 아직 신인작가였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직접 관리하지 않았고, 즈보로프스키를 통해 파리의 화단에 데뷔시킨다. 폴 기욤이 메이저리그 선수 매니저였다면, 즈보로프스키는 마이너리그에서 유망주를 키우는 메니저였던 셈이다.

즈브로프스키가 파리에서 화상으로 활동할 무렵, 이미 파리에서는 '근대화의 아버지' 폴 세잔과 '물랑루즈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 그리고 ‘풍경화의 대가’ André Derain이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즈브로프스키는 폴 기욤을 비롯한 선배 화상들의 소개로 만난 모딜리아니, '인상주의 대가' 샤갈과 그리고 André Derain의 그림을 주로 취급했다. 즈브로프스키는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닌 500프랑의 돈을 모딜리아니에게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계약서가 아닌 신의로 맺어진 이 약속은 곧잘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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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생전 모습


하지만 즈브로프스키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신뢰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는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니스 시절에 즈브로프스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으며, 종종 그림이 완성되었는데 마음에 들어서 팔고 싶지 않다는 유머러스한 편지를 즈브로프스키에게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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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한나 즈보로프스키의 초상>

또한 모딜리아니는 즈브로프스키와 그의 안내 한나 즈브로프스키를 모델로 여러편의 드로잉과 유화를 제작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드로잉 속 즈브로프스키는 날렵하고, 시원한 외모를 가진 남성으로 묘사된다. 또한 당시 파리의 가난한 화가들을 따뜻하게 대했던 한나는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서는 일종의 ‘여신’과도 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하지만 즈보로프스키는 오늘날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가장 많이 취급한 화상이자, 동시에 위작을 양산한 범죄자로 지탄받고 있다. 그는 모딜리아니가 니스에서 돌아온 후 건강 상태가 급격이 악화되자 경제적 지원을 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즈브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 사후 그의 그림 가격이 폭등하자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다른 작가를 시켜 덧칠하는 수법으로 많은 '위작'을 탄생시킨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선의로 시작해, 우정으로 이어진 관계였던 모딜리아니와 즈브로프스키. 하지만 친구의 사후에 경제적 욕심에 눈이 먼 즈브로프스키는 결국 빛바랜 우정 보다는 경제적 실리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를 직간접적으로 후원했던 거물급 화상인 폴 기욤이 최초로 개인 컬렉션에 기반한 박물관(오랑주 박물관)을 만들어 낸 것에 비한다면, 즈보로프스키의 선택은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평범한 화상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 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오는 3월 16일(일)까지 고양 아람누리에서 열리는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전>에서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레오폴드 즈브로프스키를 모델로 한 드로잉으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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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0 15:53 2008/01/2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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