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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생전 사진(1861)

1839년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오늘날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이 탄생한다. 그는 여느 명문가 집안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의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는 곧 지루한 법학공부에 염증을 느꼈고, 친구 에밀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고향 친구인 에밀 졸라와 세잔의 우정은 평생을 지속된다. 한편 세잔은 파리에서 훗날 ‘인상파의 거장’으로 불리는 화가 피사로 그리고 기요맹과 인연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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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에게 책을 읽어주는 폴 세잔


그는 처음에는 인상파전에 참여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곧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다. 세잔이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사물과 풍경에 대한 묘사였다. 특히 그는 ‘정물화’를 그리는 것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잔의 작품은 처음에는 비평가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된다. 사람들은 세잔을 정신병자 취급했고 결국 세잔은 1986년 파리를 떠나 낙향한다. 그는 정물화를 그릴 때 단순히 사물을 정교하게 캔버스 위에 옮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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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의 거리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라도 구도를 바꾸면서 사물에 닺는 빛의 양을 조절했고, 심지어 모델을 놓고 초상화를 그릴 때에도 수십 번씩 포즈를 바꾸게 하는 것을 예사로 여겼다. 실제로 그의 유명한 그림 중에 ‘사과’를 그린 정물화가 많은데, 그가 그리던 사과가 썩어버리자 석고로 모형사과를 만들어서 그림을 완성했다는 일화는 그림 특히 정물화에 대한 그의 완벽주의를 엿보게 한다.

그가 그린 정물화 중에 어떤 그림은 3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도 있으며, 풍경화 역시 2년이 넘는 시간을 공들여 완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근 이러한 노력을 통해 “자연은 구형 ·원통형 ·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는 자신만의 미술관을 확고하게 작품 속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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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걸쳐 완성한 정물화

결국 그를 비웃던 평론가는 물론 미술에 대해 무지했던 일반인들도 세잔의 작품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1906년 비오는 날 풍경화를 그리던 도중 벼락을 맞고 숨을 거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병역을 기피해 추적을 당하던 도중에도. 오직 그림밖에 모르던 화가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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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의 자화상


그의 죽음 이후 파리에서 열린 첫 번째 회고전은 훗날 큐비즘이 태동하는 출발점이 된다. 파블로 피카소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역시 파리에서 열린 세잔의 회고전을 받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젊은 화가 중에 한 명이었다. 오늘 미술사에 이런 명언이 있다 “현대 미술에 피카소가 없으면 미술사 책의 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폴 세잔이 없었다면 피카소라는 천재 화가는 탄생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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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9 23:10 2008/01/29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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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자콥의 생전 모습

유태계 시인 막스 자콥은 1876년 프랑스 브르타뉴의 수도 캥페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22세가 되던 해 프랑스 파리에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아직 젊은 화가였던 파블로 피카소와 친분을 맺게 된다. 자콥은 피카소에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 것을 허락했으며, 피카소가 경제적으로 자립에 성공해 아틀리에를 얻자 그의 아틀리에에 훗날 유명해지는 ‘세탁선’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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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자콥의 고향, 캥페르

전후 전위 예술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로 달아오른 프랑스 파리에는 수많은 젊은 보헤미안 예술가 들이 몰려들었다. 자콥은 훗날 야수파(큐비즘)라 불리는 보헤미안 화가들을 위해 ‘정신적 지주’ 아폴리네르와 더불어 이론가이자 대변자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파리에서 등장했던 셀 수도 없는 화풍과 학파들 중, 오늘날까지 야수파가 인정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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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자콥은 피카소가 그린 작품 중 최고의 걸작 중에 하나인 ‘아비뇽 여인들'이라는 작품에 직접 제목을 붙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괴기스러움에 가까운 기하학적인 인물과 배경 묘사로 훗날 예술계에 충격을 던졌던 피카소의 작품을 처음 대면한 자콥은 스페인의 수도 바르셀로나에 있는 유명한 사창가의 이름을 작품명으로 선사했다. ‘보헤미안들의 대변가’이자 시인이었던 막스 자콥이 아니었다면 절대 발휘할 수 없는 작명 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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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렝


이러한 자콥의 자유로운 사상에 매료된 대표적인 친구들로는 시인 장 콕토(Jean Cocteau)와 영국화가 크리스토퍼 우드(Christopher Wood) 그리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나치에 맞서 싸운 프랑스의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렝(Jean Moulin) 또한 이 무렵 자콥과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막스 자콥은 모딜리아니와 3년간 열애했던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를 소개할 만큼 절친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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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콕토의 실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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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가 그린 <장 콕토>


하지만 자콥은 ‘자유로움과 개성이 넘치는’ 보헤미안들의 사상과 예술을 대변했지만, 정작 본인은 전위 예술이 아닌 조요하고 평범한 삶을 추구했다. 때문에 그는 2차 세계 대전 기간 중이었던 1944년 게슈타포에 의해 은둔지였던 드랑시(Drancy)에서 체포되기 전까지 약 30년간 외부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소설 Saint Matorel (1911), the verses Le laboratoire central (1921), and Le défense de Tartuffe (1919)등이 유명하며, 그의 사후에도 유작들이 유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추가로 발견되어 유고작으로 발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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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자콥이 숨진 드랑시 유태인 수용소


사실 게슈타포에 의해 '드랑시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 감금된 막스 자콥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체포 후 4년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절친한 친구였던 파블로 피카소와 몇몇 친구들에 의해,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성당에 묘지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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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2 21:27 2008/01/2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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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 파리에서 만난 모딜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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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8 16:20 2008/01/1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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